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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은 파리에서 돌아오면서부터 왕성한 작업을 펼쳐보였다. 이토록 치열한 작업의 진행을 주도해가는 경우는 결코 흔치 않는 일이다. 92년 원화랑에서의 개인전을 시작으로97년 원화랑, 98년 프랑스 문화원의 개인전이 이어지다가2001년 금호미술관, 2004년 김종영 미술관, 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잇따른 미술관 개인전은 어떤 정점을 장식해주고 있는 인상이다. 최근8년 사이 세 개의 주요 미술관에서 초대전을 가졌다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로 이는 정현의 작업이 갖는 분출하는 에너지와 주도한 창작의 집념이 어떤 공감을 이루면서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본다. 이는 결코 우연한 행운은 아니다.
 파리에서의 귀국 후의 그의 작업은 석고로부터 시작된다. 흙으로 만든 덩어리를 각목이나 삽과 같은 기구로 내려쳐 볼륨과 날카로운 단면을 만들어 이를 주물로 떠내었다. 이들 작품은 비교적 조각 본래의 양괴에 충실한 것일 뿐 아니라 소재가 인물이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조각의 문맥에 밀착된 것이었다. 흙덩어리를 주물고 각목이나 삽으로 일정 부분 강한 물리적 반응을 가하여 일그러진 인간의 형상을 묘출해준 것들은 때로는 고뇌하는 인간상으로, 때로는 묵상하는 인간상으로 나타났다. 설명적인 부위와 날카롭게 깎아 내린 단면을 대비시킨 이들 인간상은 기념비적인 내연을 지닌 것으로 로댕의  발자크상이나 부르델의 배토벤 상을 연상케 하였다.
그가 에콜 데 보자르 시절 추구해보였던 형해화 된 인간상에 비하면 풍부한 볼륨을 지닌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거의 미이라에 가까운 깡마른 뼈대만이 앙상하게 남아난 보자르 시절의 작품이 갖는 선적인 것에 비하면 양괴적인 요소가 되살아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업은 일정한 시기를 두고 환원과 일탈이 주기 화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적인 작업에 이어 양괴적인 작업이 나타나다가 다시 선적인 작업이 등장하고 이어 양괴로 다시 환원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때로는 이들 선적인 요소와 양괴적인 요소가 하나의 작품 속으로 융화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침목에 의한 군상 계열이 이에 속한다.
그가2006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초대전에 집중적으로 선보인 침목에 의한 작품은 그의 조각하는 태도 또는 조각에 대한 독자한 인식을 가장 극명히 보여준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시장과 전시장 사이를 연결하는 긴 공간에 진열된 침목에 의한 인간상은 마치 진시황의 토용을 방불케 한 것이었다. 땅 속에 파묻혀 오랜 세월 지하에 있던 흙으로 만든 병사들이 밖으로 들어났을 때의 그 장대한 스케일과 엄청난 땅의 열기가 능히 몇 천 년을 견디어온 역사의 도저한 무게를 감당한 것이었는데 정현의 침목에 의한 인간상은 그러한 역사적 유물과 비교되면서 인간과 산업사회, 인간과 근대문명의 치열한 대결과 화해의 기념비적 형상으로 인상된 것이었다.

정현이 침목에 관심을 기우린 것은 꽤 오래 되었다. 그의 말처럼 침목을 발견하고 바로 그것을 재료로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방치된 상태로 놓아두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를 재료와의 만남이 단순한 사용자와 대상으로서의 관계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순치되는 일정한 시간을 경과한 후(그는 약10년 간 놓고 보았다고 한다)에 작업에 임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발견이 곧 창작이 될 수 있는 내역을 말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르셀 뒤샹은 발견하는 것도 창작이라고 하였는데 정현이 침목을 발견한 순간 이미 창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어느 날인가 버려진 침목을 본 순간 레일 아래에서 육중한 무게와 비바람을 묵묵히 견뎌온 인고의 세월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마치 침목이 한 인간이란 역사처럼 다가온 것이다.” 그의 말은 침목을 단순한 재료, 물질로서 본 것이 아니라 인고의 세월을 한 몸에 지닌 인간의 역사로 보았다는 것이다. 침목의 군상이 그토록 강열하게 어필해오는 것은 침목이 버려진 재료의 사용이란 점에서도, 조각으로 다루기에는 적절한 재질이 아님에도 이를 극복해주었다는 점에서도 아니다. 그것이 인간의 인고의 역사로 다가왔기 때문에 감동을 준 것이었다.
 
정현이 선택하고 있는 재료는 대부분 버려진, 용도가 폐기된 질료들이다. 현대 사회에서 버려진 질료란 상당 부분 산업 쓰레기일 것이 분명하다. 침목이 그렇고 아스콘이 그렇고  막돌이 그렇고 철근이 그렇다. 그것들은 어떤 용도에 사용되었다가 용도가 다한 것이다. 버려졌다는 것은 용도가 폐기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버려진 질료들이 정현에 의해 발견되고 그의 손을 거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의 작업장에는 이렇게 버려진 산업 쓰레기들이 새로운 삶의 탄생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정현만큼 재료에 대한 인식이 남다른 조각가도 많지 않다는 것은 그의 전체적인 작업의 맥락을 통해 볼 때 새로운 재료의 만남과 대결 또는 순치의  과정으로 엮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질과의 부딛침은 물질과의 만남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함인데 때로 격렬한 대응의 형식을 띠는 경우는 물질의 내면에 잠자는 본성을 일깨우기 위한 조치이다. “침목 작업에 들어가기 오래 전부터 침목 그 자체의 엄청난 에너지에 주목해 왔었다”는 말은 침목 속에 잠겨있는 에너지란 본성을 어떻게 끄집어 낼 까의 접근이기도 하다. 침목은 길게 이어지는 레일을 받쳐주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가 침목 속에 엄청난 에너지를 감지했다는 것은 침목이 지닌 역사성에서다. 단순히 레일을 떠받치고 있는 물질이란 사실 외에 오랜 시간을 두고 지탱해왔다는 시간의 두께가 겹쳐진 것이기도 하다. 용도가 폐기된 침목은 레일을 받쳐주는 기능이 폐기되었을 뿐 그것이 지닌 인고의 시간의 두께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무게에 다름 아니다. 다른 폐기물에서도 이 역사의 무게를 발견하게 된다. 그가 선택한 재료가 지닌 이 특별한 내재율이야말로 다른 조각가들에서 엿볼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선택하고 있는 재료는 조각 일반의 재료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 대부분이다. 청동에 의한 작품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재료가 생경한 것들이다. 과연 이런 재료로 작품이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일어날 때도 있다. 창작에 앞서 발견이 그에겐 더욱 의미 있는 과정이 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살아 있음 그 자체, 날 것, 예측을 불허하는 이미지”가  그의 작품 전체를 관류하는 요체가 아닌가 생각된다. 생생한 세월의 무게를 그대로 나타내려는 의도나 다듬지 않고 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날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의 대담한 제시는 지금까지 조각이 시도해온 변형시키고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일체의 방법적 논리에 반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일탈의 조각이 갖는 의도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종영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은 주로 아스콘에 의한 작품이 중심을 이루었다. 침목이 철로 밑에 깔려있었던 질료라면 아스콘은 길바닥에 누어있었던 것이다. 침목에 못지않게 아스콘 역시 엄청난 시간의 무게, 역사의 겨를 지닌 물질이 분명하다. 침목이 조각의 재료로 발견되는 것보다 아스콘이 조각의 재료가 되는 것은 더욱 예상되지 않는 일이다. 아스팔트 콘크리트 덩어리인 아스콘이 조각의 재료로 선택되었다는 자체만으로도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도 그는 날것에서 오는 생명력, 거칠고 팽팽한 표면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생명의 에너지를 발견했음이 분명하다. 아스콘이 선택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막돌이나 석탄 덩어리를 그대로 조각으로 가져올 수 있었던 대담한 선택의 문맥에 이어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래 위에 설치된 아스콘 덩어리는 공중에서 내려다 본 산맥의 한 단면 같기도 하고 땅에 누인 인간의 모습으로도 유추되었다. 땅 속에 파묻혀 있던 오랜 무덤 속의 미이라처럼 응고된 형상을 띤 것이었다. 다른 어떤 질료보다 생생한, 있는 그대로의 날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고 할까.
 
조각가로서 정현은 조각에 못지않게 많은 드로잉을 남기고 있다. 드로잉은 그에게 있어 조각과 따로 떼어내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조각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동시에 드로잉의 연장선상에서 조각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드로잉은 종이에 연필로 하는 것도 있고 골타르와 같은 끈적끈적한 질료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드로잉은 대체로 인간상 또는 인간의 신체 부위에 집중되었다. 일회적이기 때문에 드로잉은 다분히 직설적인 성향을 띨 수밖에 없다. 최근의 드로잉은 질료자체가 형태를 대변하듯 날카로운 필선 자체가 존재감으로 현전하는 것들이다. “가을을 지나 누렇게 누워있는 풀들을 철판에 드로잉했다. 착색된 철판을 철근, 톱으로 긁어내거나 자동차 뒤에다 철판을 메어서 자갈밭을 끌고 다니면 거기서 얻어지는 자연스럽고 우연한 흠집들이 산화되어 녹으로 바뀐 이미지 작업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드로잉은 날카로운 필의 획, 형태보다 달리는 필의 획이 먼저 나타난다. 그린다는 행위에 앞서 그려지고 그린다는 행위보다 먼저 마무리된다. 물질에 강하게 부딛침으로 들어나는 필의 획이 갖는 날카로움이 날카로움 그 자체로 현전한다. 어쩌면 이는 그의 조각에서 들어나는 형태를 앞 질어 질료 자체가 들어나는 경우와 일치한다.
 
그의 작품이 보여주는 양괴적인 것과 선적인 것의 부단한 반복 현상처럼 수평적인 것과 대비적으로 수직적인 것의 반복현상도 지적할 수 있다. 아스콘에 의한 수평적인 형상에 비해 그가 최근 시도하고 있는 버려진 철근에 의한 수직적인 형태는 전반적으로 수직적 의지의 상승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미 수직적 형상은 현대미술관의 개인전 때 분명히 들어났다. 미술관 입구에 설치된 기둥들은 그의 미래의 작품이 지닌 의도를 흥미롭게 시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작품은 폐기된 철근에 의한 수직의 의지를 표상한 것이다. 이 솟아오르는 형상은 최소한의 형태로서의 조각의 범주를 벗어난 것으로 가까스로 존재한다고나 할까. 조각이기도 하고 조각이 아니기도 한 경계 선상에 가까스로 존재하는 것, 형태이기도 하고 형태가 아니기도 한 간극 속에 가까스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발산하는 팽팽한 긴장감이 온통 전 공간을 거대한 탄력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오광수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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